티스토리 툴바





척 베리(Chuck Berry) 또는 찰스 에드워드 베리(Charles Edward Berry, 1926년 10월 18일~)는 미국의 가수이다.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교회 성가대원이었던 양친의 감화를 받아 가수에 뜻을 두어 유흥업소에서 활약하기 시작하였고, 시카고의 체스 레코드회사 사장의 인정을 받아 전속 가수가 되었다. 1955년에 데뷔곡인 《메이베린》이 밀리언 셀러로 선정 되었다. 그 밖에 자작곡인 《멤피스》, 《스위트 리틀 식스틴》, 《로큰롤 뮤직》 등의 히트곡이 있다.





척베리의 대표곡이라 할만한 Johnny B. Goode
블루스 음악의 교과서적인 곡이 아닌가 싶다. 무려 1958년에 발표된 곡임.

Posted by 블랙맘바 neoron

TRACKBACK http://neoron.tistory.com/trackback/139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영국에 사는 마크 플레일이라는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왼쪽 팔 아래쪽이 없이 태어났지만 런던에서 열린 기타대회의 결승에서 전세계에서 온 750명의 두 손 가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결선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피크를 쥘 수 없는 손임에도 불구하고 14살 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피크를 못잡는 대신 기타 픽을 고정시킨 인공수족을 쓴다고 합니다.


요번에 열린 세계 최고의 유망주 선발대회의 최종 12인 결승에 올랐다가 브라질 연주자에게 결승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평가단이 매우 감동받은 것을 보였고 그 중의 한 사람은 내가 최종 2인 리스트에 올랐었다고 귀띔했다”고 말했답니다. 이제 곧 음반도 나올꺼라고 하네요..

하면된다라는 그의 의지에 박수를 보냅니다. 나도 열심히 쳐야지 ㅠㅠ


Posted by 블랙맘바 neoron

TRACKBACK http://neoron.tistory.com/trackback/41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본인의 생애 첫 밴드인 Blanky의 보컬이었던 마로군..
드디어 첫 싱글 앨범이 나왔습니다.

하는 사람이 아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만드는 사람의 고통은 또 다름을 알기에
무한 화이팅을 보내주고 싶네요~

Posted by 블랙맘바 neoron
TAG 마로

TRACKBACK http://neoron.tistory.com/trackback/37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 기타리스트 한상원 인터뷰

인터뷰한다는 마음을 지우고 뮤지션을 만나는 것은 기분 좋은 '무장해제'다. 경기 일산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인터뷰라는 암암리의 부담과 긴장은 전혀 없었다. 그저 좋은 사람과 자리해서 음악이야기를 나눈다는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거의 1시간 늦게 도착한 무례에도 불구하고 그는 활짝 웃음으로 손님을 맞았다. 아내가 일 때문에 집을 비웠다며 직접 과일을 깎아 가져오는 그의 접빈객(接賓客)은 각별했다. 첫 마디도 “제가 뭐 인터뷰할 게 있나요? 저도 그냥 긴 시간 임진모씨와 한번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였다.

한상원은 리듬이 생명인 음악인 펑크(Funk) 부문에 획을 그은 인물이다. 아마도 국내에 펑크 연주와 음악이 지금과 같은 지분을 행사하게 된 것은 한상원과 같은 일각의 선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97년에 발표한 솔로 2집의 타이틀이 < 펑키 스테이션(Funky Station) >이며 이듬해 이현도와 같이 작업한 앨범의 제목도 < D.O Funk >임은 그 증명이다.

그는 독자적 활동 그리고 동료 뮤지션들과의 협연 앨범 등 보폭이 넓은 활동으로도 이름이 알려졌지만 특히 펑크밴드 긱스(Gigs)의 멤버로도 유명하다. 정원영(건반) 강호정(건반) 정재일(베이스) 이상민(드럼) 이적(리드 보컬)과 함께 한상원은 1999년과 2000년에 발표한 2장의 앨범으로 국내에 신선한 펑크 바람을 몰고 왔다.

자주 무대에 서는 인물이지만 그래도 근황을 비롯해 긱스 신보발표 여부 등이 궁금했다. 그는 모든 질문에 서글서글하게 또 막힘없이 답변했으며 대부분 기타를 들고 직접 연주를 시범하며 시원시원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대화 도중 이게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쓰던 퍼즈(Fuzz) 톤 이펙터이며, 저것 역시 그 시대의 연주자들이 즐겨 쓰던 마샬 앰프라고 가리키면서 실연(實演)하는 대목에서는 “전 이 톤이 훨씬 좋아요!”를 연발했다. 순간, 그가 현재 강단에 서는 서울예대의 수업을 받는 느낌이었다. (학생의 수업태도와 집중도는 높았다)


요즘 공식적인 것 말고 사적으로 연주하는 장(場)이 있나요?
그럼요. 개인적으로 '한상원밴드'를 조직해 < 천년 동안 >이라는 조그만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연습장으로 활용하는 거지요. 멤버는 초기 저와 최원혁 정재일 이지영이었는데 리드 보컬인 이지영이 빅마마로 나가게 되면서 전에 '한상원 정원영 밴드' 때 노래했던 유진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요. 제가 있는 서울여대와 동덕여대 학생들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독집 앨범이나 '긱스' 앨범 소식이 들리지 않는데...
긱스는 멤버 공동의 여유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구요, 2년 전에는 제 개인 앨범도 준비를 했는데 제작사 사정 때문에 접어버렸어요. 인제는 그런 것 따지지 않고 개인이든 조금 전에 말씀드린 '한상원밴드'든 앨범을 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시장상황이 열악해서 앨범이 벌이로서의 기능은 끝난 시점이긴 하지만 그래도 발표의 개념은 여전히 중요하죠. 앨범은 내야 합니다. 그게 아티스트의 행로이고 인생의 길이죠.



지난 번 전화했을 때 과거 1970년대의 우리 음악에 최근 빠져있다고 했습니다. 연신 그 시절의 음악이 너무 좋다고 말한 게 기억나는데요, 어떤 점이 그렇게 끌리며 무슨 발견을 한 건지 궁금합니다.
신중현, 김추자씨가 나오던 시기가 예술적으로 국내 대중음악의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신중현, 정성조, 사랑과 평화 등의 음악을 들으며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신중현선생님의 '미인'을 들으면 실로 엄청난 공력을 느낍니다. 젊은 연주자들이 이것을 실감하지 못해서 조금 안타깝죠. 왜 좋으냐고 물으시면 글쎄요, 이렇게 말할까요. 그 시절 음악은 성형수술 하지 않고도 예뻤다? 순수하고 자연미인(美人)적이라는 거죠. 성형에 의한 것은 부자연스럽잖아요.

본격적으로 들어 가볼까요. 지금까지 한결같이 펑크(Funk) 음악 연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왜 이 음악인지, 이 음악이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과정을 말씀드릴 게요. 전 10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어요. 처음에는 통기타를 나중에는 클래식 기타를 연주했는데 어느 날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lmer)의 'From the beginning'을 듣고 일대 충격을 받았어요. '이런 세계가 있나' 했죠. 그 뒤 중3 때인가 고1 때인가 속주에 빠졌어요. 그 때는 '연주가 얼마나 빠르냐'가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이었죠. 그러면서 1970년대 중반 학생 때 몰래 알바로 고고장에 나가 연주하곤 했는데 속주만 했더니 리듬도 전혀 못타고 블루지한 맛도 안 나는 거예요. 한마디로 콤플렉스였죠. 그래서 펑크를 하게 된 거예요.

콤플렉스 때문에 펑크를 하게 됐다! 재미있는 얘기네요.
미국 버클리 음대에 가서 그곳의 일급 펑크 연주자들과 협연하고 앨범 세션에도 참여하게 됐어요. 존 맥러플린(John McLaughlin)밴드의 드러머 타미 캠벨(Tommy Campbell), 애론 스코트(Aaron Scott), 밥 모제스(Bob Moses) 등이었죠. 솔직히 버클리 음대에 재즈를 하려고 간 것은 아니었어요. 펑크 뮤지션들과 어울리면서 콤플렉스는 완전히 벗었죠. 거기서는 잘되더라구요. '펑크 마스터'라는 별명으로 통했죠. (그것은 누가 붙여줬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 타미 캠벨이었다고 답했다) 콤플렉스를 가졌던 음악이 이제는 내가 잘하는 것이 된 겁니다. 제 인생에서는 참 중요한 부분이지요. 후배들에게도 자주 얘기하고...

그런데 한국에서는 펑크 음악이 여전히 관객들한테 어렵잖아요. 그것이 본래 관객보다는 연주자가 주가 되는 스타일이기도 하구요. 어때요, 국내에 펑키 뮤직을 인식시키기가 힘들지는 않습니까?
오랜 라이브를 통해 조금 조금씩 자극을 주면 관객과 무대가 교감하는 면이 생겨난다고 봐요. 사실 미국에서 하던 펑크와 여기서 하는 펑크는 다르죠. 특히 '70년대에 김덕수와 사물놀이패와 연주하면서 다져지고 몸에 밴 '국악적 필'이 있어서 느낌이 판이하죠. 여기서는 관객들이 펑크를 대할 때 패션을 따지고 외적인 요소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긴 해요. 펑크 무대는 이런 이미지여야 한다는 거죠.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전 우리의 힘, 국악의 힘을 믿습니다. 펑크가 국악과 흡사한 점이 있거든요. 연구가들에 따르면 리듬으로 볼 때 아프리카의 50%와 우리의 50%가 같다는 겁니다. 국악에도 펑키(Funky)한 측면이 강한 거죠. 펑크를 무조건 서양음악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좋은 성과가 있으리라 봅니다.

버클리 때도 그랬을 것이고 국내에 와서도 많은 외국 연주자와 무대를 가졌습니다. 늘 궁금했는데, 외국 연주자들은 한상원씨의 기타 연주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버클리 때 외국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뭔가 다르다구요. 동양 친구들은 외국의 패턴을 연습하고 추종하는데 전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건 제가 한국인이고 한국의 리듬이 몸에 있기 때문이죠. 펑크 연주자들은 늘 스펀테니어스(spontaneous) 즉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맛을 잃지 말자고 하죠. 그런데 스펀테니어스한 맛은 우리 음악 특히 국악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난 연주에 있어서 원래 카피를 못했어요. 따라 치기가 싫더라구요. 펑크와 블루스는 악보도 잘 못 봅니다.”고 말했다. 생래적일 수도 있지만 그가 연주의 스펀테니어스한 필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반(反)카피, 피(避)악보의 자세를 유지하는지도 모른다. 1960년에 태어나 1976년 정원영과 그룹을 결성하면서 음악활동을 본격화하고, 나중 1984년 버클리 음대에서 프로페셔널 뮤직을 전공하여 1989년 졸업하고, 이후 무수한 국내외 연주자들과 공연 또는 앨범 작업을 한 컬러풀 음악행로를 통해 그가 체화한 것은 바로 그 스펀테니어스한 연주였을 것이다.

그에게 다시 한번 왜 펑크와 블루스인가를 물었더니 그는 “신명나서죠. 삼매(三昧)라고 할까요. 쭈욱 빠져가요.”라면서 '삶에 있어서 자신의 중심을 느끼는 쾌감'으로 펑크와 블루스 하는 즐거움을 정의했다. 여기서 그것 또한 스펀테니어스한 맛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봇물을 이루는 국악과의 크로스오버 경향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네요.
일견 인정할만한 추세이지만, 국악과 서양음악의 운율과 리듬을 짜 맞추는 것은 싫습니다. 국악은 국악대로, 서양음악은 서양음악대로 가는 것이 좋다고 봐요. 그래서 가다보면 언젠가 만난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대학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한데요, 후배들이나 학생들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중점을 두는 것은 뭔가요?
리듬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음(音)만 맞으면 음길이만 맞으면 되는 걸로 아는데 실제로 요체는 리듬이라는 겁니다. 전 음악의 3대요소를 리듬 하모니 멜로디 순으로 봅니다. 즉흥연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음악에 있어서 '뭔가 나오는 것'은 리듬이죠.

리듬감각은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것 아닌가요? 꼭 배워서 될 성질, 누구나 잘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펑크연주에 콤플렉스가 있다고 말했잖아요. 노력하면 달라져요.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리듬 감각이 잠재되어 있다고 믿어요. 이건 중요한데요, 리듬을 익히는데 먼저 앨범을 틀고 들으면서 연습을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전 여기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앨범을 들으면서 연주를 하면 그게 바로 '합주'의 개념이죠. 아마도 리듬을 알게 해주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겁니다.

지금까지 음악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순간들이 있었을 텐데요.
우선 1984년 처음 버클리에서 친구들과 잼 하러 갔다가 한 곡도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던 순간입니다. 너무 창피했어요. 처절하게 망신을 당한 거죠. 하지만 그 경험이 보약이 됐다고 생각하구요. 아까 말씀드렸듯 저에게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간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From the beginning'을 들었던 순간입니다.
그리고 1986년인가 정확한 해는 모르겠는데요, 버클리 때 애론 스코트와 6시간 동안 한번 물마시고 내리 연주했던 순간도 기억에 남아요. 말할 것도 없이 2004년 거장 하이람 블록(Hiram Bullock)과 연주한 것이나 나의 대가이자 스승인 래리 칼튼(Larry Carlton), 스티브 루카서(Steve Lukather)와 협연한 일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죠. 굉장한 펌프질이고 레슨이자 저를 확인하는 기회였습니다.

수많은 국내 뮤지션들과 작업을 했는데 인상적이었던 사람이 있다면
먼저 (전)인권이 형입니다. 성공한 앨범은 아닙니다만 에너지를 추구하는 무언가가 있는 분임을 느꼈어요. 거기서의 기타솔로가 맘에 드는데, 그런 솔로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니 인권이형이 노래했기 때문인 겁니다. 한사람 더 든다면 정재일군이죠. 재일이는 22살밑인데 '한상원밴드'에서 베이스를 칠 때 겨우 중2였죠. 만능이고 아이디어도 넘쳐요. 더 좋은 환경에서 음악을 해서 뿌리를 잘 내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연주지망생에게 권해줄 만한 톱10 앨범을 주문했더니 그는 받아 적기 힘들만큼 속사포로 음반들을 꼽아 내려갔다.
그것은 허비 행콕(Herbie Hancock)의 < Thrust >,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 20 All Time Greatest Hits >, 마이클 프랭크스(Michael Franks)의 < The Art Of Tea >, 스틸리 댄(Steely Dan)의 < Gaucho >, 제프 벡(Jeff Beck)의 < Blow By Blow >, 제프 벡 위드 얀 해머 그룹(With Jan Hammer Group)의 앨범,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 Ⅱ >,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 Band Of Gypsies >를 포함한 정규 앨범 4장 전부,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 We Want Miles >, 프린스(Prince)의 < Graffiti Bridge >였다.
세상에, 그처럼 빠르게 줄줄이 앨범을 댄 사람은 일찍이 보질 못했다.


우리 나라 최고의 펑키 연주자이며 즉흥 연주자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는 한상원(1960년)은 10살 때 처음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교 때부터 정원영, 김광민 등과 그룹 쉼 등을 조직해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이어 김태화 밴드를 거치며 전문 연주자의 꿈을 키워가던 그는 외국의 연주자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미국 길에 오르고 보스톤에 있는 버클리 대학에 적을 두게 된다. 그는 재즈를 전공했지만 항상 록적인 음악을 기조에 두고 세션을 벌였으며 아직까지도 재즈보다는 온갖 종류의 펑키함에 몰두하고 있다.

한상원은 미국에서 활동을 하고 싶어 비자의 연장을 위해 대학원에 들어가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의치 않자, 국내에 들어와 첫 음반을 내고 국내에 버클리 유학의 열풍을 몰고 온 뮤지션의 한 명으로 기록된다.

기타로 살짝 가린 얼굴만큼 보코더의 뒤로 숨은 그의 목소리가 특징적인 그의 데뷔 앨범에는 후에 김현철이 리메이크 했던 애잔한 톤의 '물망초', 8소절의 블루스 넘버 'Will's blues' 등이 있고 펑키 사운드로 중무장한 곡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하지만 이 음반은 대중적으로 상당한 외면을 받고 그는 자신의 음악 성향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된다. 그는 이후 전인권과 같이 작업한 음반으로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과 대중과의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그룹 봄여름가을겨울, 한충완, 송홍섭, 정원영 등과 의기투합하여 프로젝트 밴드 슈퍼밴드(Super Band)를 결성해 퓨전 재즈와 펑키한 음악에 대한 깊은 탐구를 시작한다.

슈퍼밴드의 팀원들 위주로 발표한 2장의 앨범은 가볍고 경쾌한 퓨전 음악을 들려주며 국내 시장성을 타진했지만 거대 자본과의 결탁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음반은 매니아들의 입에서만 오르내리는 음반이 되고 말았다. 이 음반에는 블루스에 대한 예찬론인 'Blues Bless', 한상원의 펑키를 주제로 한 'Sang's Blues' GRP 레이블의 풍성한 퓨전 재즈의 향연을 느끼게 하는 'Night Ride', 'Black & White'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국내 퓨전 재즈 애호가들의 호감을 살만한 'Us'라는 곡이 그와 한충완의 필링으로 격조 높은 앙상블을 이뤄내고 있다.

강산에, 봄여름가을겨울, 조규찬, 낯선사람들, 김현철, 이소라 등 여러 가수들의 앨범에서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드러낸 한상원은 정원영과 총제극 <영고>에서 제작과 세션을 맡아 역량을 발휘하고, 정원영과 계속 작업을 같이 해 둘의 이름을 딴 한정밴드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한상원은 1997년 자신의 두 번째 음반을 발표한다. 신해철, 이현도, 이소라 등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들과 함께 한 이 음반에서 그는 여지없이 몰아친 펑키의 폭풍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음악계에 그의 음악 세계를 완전히 드러내었다.

계속 한정밴드로 공연을 하며 고정 팬들을 확보한 그는 이현도와 김성재의 그룹 듀스의 마지막 앨범인 <Force Deux>의 참여와, 자신의 솔로 앨범에서 '이탈'을 불러준 인연으로 이현도와 합작 음반을 제작한다. 서로의 재능에 반한 두 뮤지션의 화합은 모든 장르 속에 힙합과 펑키의 그루브를 연계시켰으며 '폭풍/U got the funk!'와 같은 곡을 히트시켰다.

현재 서울 재즈 아카데미의 기타과에서 학과장을 맡고 있고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신중현 트리뷰트> 음반에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미인'으로 참여했으며 한정밴드에 합류한 패닉의 이적과 함께 긱스를 출범시켰다.

그의 음악에 소신과 열정은 여전히 변함없지만, 주류가 되지 못했던 자신의 음악은 방법론적인 시각을 획득하고 점점 대중 속으로 들어오고 있으며 아직까지 긱스의 음반들은 그렇게 훌륭하지 않았지만,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순간의 광풍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2001/06 지운
Posted by 블랙맘바 neoron
TAG 한상원

TRACKBACK http://neoron.tistory.com/trackback/23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왠만한 사람들은 영국에 핸드폰 파는 오페라 가수 하면 다 알고 있는 폴포츠

프로그램에서 약속했던대로 들어갔던 앨범작업이 완료가 되고 벌써 앨범이 나왔습니다.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노래들 외에 그동안 익숙하게 우리가 알고 있던 곡들을 불렀군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이니 만큼 대중적인 곡으로 접근한 듯 합니다.

머 전문적으로 성악을 하는 사람들은 폴포츠의 노래를 성에 안차 하겠지만

일단 저같이 오페라를 많이 듣지 않고 프로그램을 통해 감동을 느끼셨던 분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앨범이라고 생각하네요~

물론 저도 폴 아저씨를 응원하기 위해 한장 샀습니다~



01 . Nessun Dorma : 첫 싱글, 브리튼즈 갓 탤런트 결승전에서 부른 곡
02 . Con Te Partiro ('Time To Say Goodbye' 이태리어 버전) : 준결승전에서 부른 곡
03 . Amapola
04 . Ognuno Soffre ('Everybody Hurts' 이태리어 버전)
05 . Caruso
06 . Nella Fantasia
07 . Por Ti Sere ('You Raise Me Up' 이태리어 버전)
08 . Mi Manera ('My Way' 스페인어 버전)
09 . Cavatina
10 . Music Of The Night


Posted by 블랙맘바 neoron

TRACKBACK http://neoron.tistory.com/trackback/21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름다운 밴드 리디안의 리더이며 보컬과 기타를 맞고 있는 강형재 선생님
저의 기타 스승님이기도 합니다.
비영리 단체인 클럽 리디안의 대표이시기도 하시구요~
Posted by 블랙맘바 neoron

TRACKBACK http://neoron.tistory.com/trackback/3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